‘너스 로그’(The Nurse Log)의 조용한 메시지

너스 로그(Nurse Log). 영어를 그대로 옮기면 간호사 통나무쯤 되겠지만,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유모 통나무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유모가 젖을 먹여 아이를 돌보듯, 쓰러진 나무가 자신의 몸을 녹여 어린 생명들을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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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05, 2026
‘너스 로그’(The Nurse Log)의 조용한 메시지
쓰러진 나무의 등 위로 작은 초록빛 점들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이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어린 나무들이었습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묘목들이 쓰러진 고목의 몸통 위에 줄지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연둣빛 잎사귀를 틔운 것도 있었고, 이제 막 씨앗 껍질을 벗고 나온 것도 있었습니다. 죽은 나무의 몸이 작은 숲의 요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숲의 생태학자들이 이 광경에 붙인 특별한 이름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너스 로그(Nurse Log).
 
영어를 그대로 옮기면 간호사 통나무쯤 되겠지만,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유모 통나무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유모가 젖을 먹여 아이를 돌보듯, 쓰러진 나무가 자신의 몸을 녹여 어린 생명들을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처럼 보였던 그 광경은, 사실 가장 헌신적인 돌봄의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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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이후에 시작되는 삶

 
나무가 쓰러지면, 보통 우리는 그것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 있던 나무가 누우면 더 이상 광합성을 할 수 없고, 물을 빨아올릴 수도 없으니, 생물학적 의미에서 삶이 끝난 것은 맞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쓸모를 다한 거대한 잔해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숲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훨씬 깁니다. 그리고 숲의 논리 안에서 끝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변환이 있을 뿐입니다. 형태가 바뀌고, 역할이 바뀌고, 에너지가 흘러가는 방향이 바뀔 뿐입니다.
 
나무가 쓰러진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2의 삶이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균류입니다. 땅속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던 균사들이 쓰러진 나무의 내부로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균류는 나무의 단단한 섬유질, 특히 리그닌과 셀룰로스를 분해하는 특별한 효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미세한 생명체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무의 구조를 해체해 나갑니다. 딱딱했던 목질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과정은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납니다. 숲은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균류의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이끼가 자리를 잡습니다. 축축하고 부드러워진 나무 표면은 이끼에게 완벽한 서식지입니다. 초록빛 이끼가 나무를 덮어가면서, 쓰러진 고목은 점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회색빛이던 표면이 녹색으로 물들고, 생명의 기운이 감돕니다.
 
그다음은 곤충들의 차례입니다. 딱정벌레, 개미, 노래기, 지네,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작은 생명들이 분해 중인 나무 안으로 들어와 집을 짓습니다. 나무껍질 아래의 틈새, 균류가 파놓은 미세한 통로, 옹이가 빠진 구멍. 쓰러진 나무 하나가 수백, 수천 마리의 생명에게 아파트 단지가 되어줍니다. 곤충들은 나무를 갉아 먹고, 배설하고, 죽어서 그 자리에 묻힙니다. 그 모든 활동이 나무의 분해를 돕고, 영양분의 순환을 촉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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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 하나가 이끼로 덮인 고목 위에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완벽한 요람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습기,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표면, 성장에 필요한 양분, 그리고 햇빛. 숲 바닥은 종종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어렵습니다.
 
먼저, 오래된 숲의 바닥에는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습니다. 작은 씨앗이 이 층을 뚫고 흙까지 도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설령 도달한다 해도, 이미 자리를 잡은 다른 식물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양치류, 관목, 덩굴 식물들이 빛과 양분을 놓고 치열하게 다툽니다. 무엇보다, 숲의 거인들이 드리운 그늘은 어린 씨앗에게 치명적입니다. 땅바닥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나무 위는 다릅니다.
 
너스 로그의 표면은 이끼가 머금은 수분으로 촉촉합니다. 분해가 진행되면서 나무의 섬유질이 풀어져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좋은 부드러운 질감이 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분해되며 방출하는 질소, 인, 칼륨 같은 영양소들이 천연 비료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땅바닥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하고,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쓰러진 고목의 등 위는 어린 씨앗에게 완벽한 묘상이 됩니다.
 
씨앗은 그곳에서 싹을 틔우고, 가느다란 뿌리를 이끼 층 아래로 뻗고, 너스 로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죽은 나무가 자신의 몸을 녹여, 어린 나무의 젖병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스 로그입니다. 생태학자들이 간호사나 유모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모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너스 로그는 전 세계 여러 숲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미국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의 태평양 연안 온대우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침엽수림, 그리고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타이가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습하고 서늘한 기후 덕분에 나무의 분해 속도가 적당히 느립니다. 너무 빨리 썩어버리면 어린 나무가 자랄 시간이 없고, 너무 느리면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절묘한 균형 위에서 너스 로그는 제 역할을 다합니다.
 
하나의 너스 로그 위에서 여러 그루의 어린 나무가 동시에 자라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같은 종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종일 수도 있습니다. 쓰러진 거목의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경우, 그 위에서 십여 그루의 묘목이 일렬로 자라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어린 나무들은 점점 커집니다. 처음에는 너스 로그의 양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뿌리들이, 이제는 너스 로그를 감싸 안으며 땅속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다가, 성장하면서 그 손을 놓고 스스로 걸어가는 것처럼.
 
그리고 수십 년, 때로는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 경이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너스 로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분해가 끝까지 진행되어 나무였던 것은 완전히 흙이 됩니다. 그 위에서 자라던 나무들은 이제 스스로 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져 있습니다. 너스 로그가 있던 자리에는 빈 공간만 남습니다. 그래서 기묘한 광경이 연출됩니다. 일렬로 줄지어 선 나무들의 뿌리가 허공에 노출된 채, 마치 다리처럼 또는 아치처럼 땅 위에 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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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자들은 이렇게 일렬로 줄지어 선 나무들을 콜로네이드(Colonnade)라고 부릅니다. 기둥이 줄지어 선 건축물의 회랑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아해합니다. 왜 이 나무들은 이렇게 일렬로 서 있을까? 누군가 일부러 심은 것일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전 그 자리에 쓰러졌던 한 그루의 나무가 남긴 흔적입니다.
 
숲을 걷다가 뿌리가 허공에 떠 있는 나무들을 발견한다면, 잠시 멈춰 서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 빈 공간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있었고, 누군가를 돌보았고,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뒤 조용히 떠난 자리입니다.
 
그 나무들은 자신을 키워준 존재를 기억할까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중요한 것은 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이 나무들도 쓰러질 것이고, 그 위에서 또 다른 어린 나무들이 자라날 겁니다.
 

썩는다는 것에 대하여

 
너스 로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썩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썩는 것을 피해야 할 것으로 배웁니다. 음식이 썩으면 버려야 하고, 이가 썩으면 치료해야 합니다. 썩은 냄새는 불쾌하고, 썩은 것에 닿으면 손을 씻어야 합니다. 부패라는 단어는 도덕적으로도 부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썩은 정치인, 썩은 사회, 썩어빠진 시스템.
 
이런 언어 습관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썩지 않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부제를 만들었습니다. 음식이 오래 보관되도록, 화장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시체가 분해되지 않도록. 그리고 플라스틱을 만들었습니다. 가볍고, 튼튼하고, 무엇보다 썩지 않는 물질.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편리함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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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숲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조금 이상하게 보입니다.
 
숲에서 썩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낙엽은 썩고, 열매는 썩고, 동물의 사체는 썩고, 수백 년을 산 거대한 나무마저도 쓰러지면 썩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썩음 덕분에 숲은 유지됩니다.
 
잠시 상상해 봅시다. 낙엽이 썩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매년 가을마다 쏟아지는 낙엽들이 쌓이고 쌓여, 숲 바닥은 몇 미터 높이의 마른 잎으로 뒤덮일 것입니다. 낙엽 속에 갇힌 양분은 순환하지 못하고 묶여버릴 것입니다. 새로운 씨앗은 흙에 닿지도 못한 채 말라 죽을 것입니다.
 
동물의 사체가 썩지 않는다면요? 숲은 죽은 것들이 쌓여가는 창고가 될 것입니다. 생명이 죽어가기만 하고 정리되지 않는 곳. 썩지 않는 사체들이 쌓여가는 숲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더 이상 숲이 아닐 것입니다.
 
썩는다는 것은, 다른 생명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너스 로그의 나무가 썩어가는 동안, 그 안에 있던 탄소와 질소와 인은 조금씩 풀려납니다. 균류와 박테리아의 몸을 거쳐, 이끼와 곤충의 몸을 거쳐, 마침내 어린 나무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쓰러진 나무를 구성하던 원소들이 살아 있는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 것입니다.
 
숲에서 부패란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다음 단계로 넘겨주는 가장 창조적인 해체 작업입니다. 가장 헌신적인 물려줌입니다.
 

숲에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란 무엇일까요?
 
숲을 아무리 오래 걸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쓰레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떨어진 나뭇가지도, 죽은 새의 깃털도, 동물의 배설물도, 썩어가는 열매도, 그 어떤 것도 쓰레기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다른 무언가의 일부가 됩니다. 새의 사체는 딱정벌레의 식사가 되고, 딱정벌레의 배설물은 흙의 양분이 되고, 그 흙에서 자란 풀은 다시 새의 먹이가 됩니다.
 
자연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순환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것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부릅니다.
 
플라스틱 병이 쓰레기인 이유는 그것이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분해되지 않고, 어떤 생명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환의 고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흐름이 막힌 것입니다.
 
숲의 언어로 말하자면, 썩지 않는 것은 막힌 동맥과 같습니다. 흐르지 않는 것. 순환하지 않는 것. 정체된 것.
 

돌아간다는 것

 
배수구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난 뒤, 세탁기가 돌아간 뒤, 샤워를 마친 뒤. 하얗게 일었던 거품이 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다가 배수구 안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저 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저 거품은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
 
하수구를 지나, 하수처리장을 거쳐, 강으로, 바다로. 우리가 사용한 물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문제는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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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낙엽이 썩어서 흙이 되듯, 우리가 사용한 것들도 자연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배수구로 흘러간 것이 오염 물질이 아니라,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결국 흙의 양분이 될 수 있다면요.
 
너스 로그가 어린 나무의 양분이 되듯, 우리가 흘려보낸 것들도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 있다면요.
 
이것은 먼 이상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숲에서는 이미 수억 년 동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자연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순환시키는 방법을요.
 
썩을 수 있다는 것.
분해될 수 있다는 것.
순환의 고리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건 약점이 아닙니다.
자연으로 돌아갈 자격입니다.
 

유모의 교훈

 
다시 숲길을 걸으며 너스 로그를 찾아봅니다.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아직 껍질이 단단하고, 이끼가 막 자리잡기 시작한 단계입니다. 이미 반쯤 흙이 되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푸석푸석 부서지는, 나무와 흙 사이 어딘가의 존재입니다. 그 위에서 어린 묘목들이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뿌리가 허공에 떠 있는 나무들을 만납니다. 콜로네이드입니다. 유모는 이미 사라졌고, 아이들만 남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빈 공간을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끝은 끝이 아닙니다.
모든 끝은 누군가의 시작이 됩니다.
너스 로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남기고 갈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환의 고리 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끝은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까?
 
숲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기 서서, 수억 년 동안 해온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쓰러지고, 썩고, 품어주고, 사라지고, 다시 시작되는 반복.
 
그리고 우리는 그 숲길을 걸으며, 천천히 무언가를 배워갑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썩음이 더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사라짐이 상실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형태의 물려줌이라는 것을.
 
오늘 걸었던 숲길에서 만난 너스 로그를 기억합니다. 그 위에서 자라던 작은 묘목들의 연둣빛 잎사귀는 먼 훗날 또 다른 작은 씨앗을 틔우는 거름이 될 것입니다.
 
숲은 그렇게 끝없이 순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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